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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산책 : 인문학의 달, 5월

인문학 산책 : 인문학의 달, 5월
<배 병 삼-영산대 교수, 정치철학>
5월은 흔히 가족의 달이라 부른다. 5일이 어린이날이고, 8일은 어버이날이며, 15일은 스승의 날, 그리고 18일 즈음은 성년의 날이다. 언제부턴가 22일은 부부의 날이 됐으며,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이쯤이면 5월 한 달은 내내 가족의 의미를 헤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 의미에서 5월은 인문학의 달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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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념일의 인문학

    기념일은 그 자체로 인문학적이다. 문학의 기능이 낯익고 평범한 일상에 문득 주름을 잡아 색다르고 낯선 느낌을 갖게 하는데 있다면 기념일의 기능도 다를 바 없다. 가령 3·1절은 봄날을 그저 평범한 봄날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드러낸 날로 채색한다. 10월 1일 개천절은 가을 날씨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민족의 기원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 나라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기념일은 무상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제동을 걸어 거기에 어떤 의미를 새겨 넣고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인문학적이다.
    어린이날이 있기 전에도 어린이들은 있었다. 아동, 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말이다. 다만 어른들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이었기에 아이들은 미성숙한 사람으로(‘미성년자’라는 말 속에 그런 뜻이 들어있다) 구분되며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방정환은 이런 아이들을 색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식민지로 전락한 현재를 극복하고 새 미래를 열 주인공이라는 뜻을 담으면서, ‘어린’ 이라는 형용사에다 ‘~이’라는 존칭을 붙여 ‘어린이’라는 새 이름을 짓고 5월의 한 날을 기념일로 삼은 것이다. 그냥 생각 없이 흘러갈 5월의 어느 봄날 중 하루가 어린이날로 불리면서 우리는 버려진 어린 것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기회를 얻고, 나아가 미래를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보는 비상한 순간을 체험하는 셈이다.
    한편 기념일은 결핍의 날이기도 하다. 특히 ‘어버이날’이 그렇다. 이날의 본래 이름은 ‘어머니날’이었다. 사람마다 어찌 어미 없는 자식이 있을까마는, 우리네 과거 삶이 워낙 힘겨웠기에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을 자식에게 먹이고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길러준 노고를 단 하루라도 추억하자고 달력에 새겨둔 기념일이 어머니날이었다. 그러니 이 날에는 눈물이 얼룩졌다. 카네이션 설화가 외국으로부터 들어와 그토록 빨리 이 나라에 정착할 수 있었던 까닭도, 이 땅의 어미들 노고가 그 어느 곳보다 힘겹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다.
    한데 언젠가부터 이날이 어버이날로 바뀌었다. 어버이란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부르는 단어이니 한자말로는 부모가 된다. 물론 숨어있는 아버지의 노고를 어머니의 그것과 더불어 기리자는 뜻으로 읽어도 된다. 어미 없는 자식이 없지만, 역시 아비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속에는 어떤 결핍의 상처가 들어있다. 어머니날로 불리던 시절, 집집마다 아버지는가부장이었다. 구태여 아버지를 드러내 기념하지 않아도 일 년 내내 ‘아버지의 날’이었다는 뜻이다. 한데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집안의 어르신으로서 대접받는 존재(어느 집에서는 폭력을 휘둘러도 용인되기도 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노동하다가 늙어가는 힘없는 아비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 아니 그렇게 비치게 된 것이다. 기억으로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1980년대 즈음이었지 싶은데, 아비들의 숨은 노고가 눈앞에 드러나 어미의 고통과 겹쳐짐으로써 어머니날은 어버이날로 개명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기념일 속에는 결핍이 들어있기도 하다.
    하긴 부부의 날도 그렇다. 이날은 옛날에는 없던 기념일이다. 한번 혼인하면 ‘검은머리가 파뿌리될 때까지’ 사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절이 지나가고, 여성으로서는 ‘죽어도 시집귀신이 돼야 한다’는 부모 말씀이 지상명령이던 시대가 흘러서 이혼으로 가정이 흔들리고 또 붕괴되는 시절에 탄생한 기념일인 것이다. 부부가 잘 살던 시절에는, 아니 결혼하면 부부관계가 당연시되던 시절에는 부부의 날이라는 기념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처럼 기념일이란 숨어있는 결핍과 바람이 재발견됨으로써 드러나는 이름이 된다.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 속에서 포착한 것이 바로 이름 속에 들어있는 어떤 균열과 결핍, 바람과 원망이었으리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부분 발췌)

  • 가족의 달이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가족이 당연시되고 무념무상하게 여겨졌을 때라면 굳이 ‘가족의 달’이라는 기념과 추억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가족의 날,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은 가족이 붕괴 위험에 노출됐거나 금이 가고 있는 징후를 상징하는 섬뜩한 기호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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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이라는 질곡

    이리하여 ‘가족의 달’이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가족이 당연시되고 무념무상하게 여겨졌을 때라면, 굳이 가족의 달이라는 기념과 추억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가족의 날,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은 가족이 붕괴 위험에 노출됐거나 금이 가고 있는 징후를 상징하는 섬뜩한 기호로 읽혀야한다.
    실은 고독사라는 한마디 말 속에도 오늘날 가족 몰락 현상이 요약돼있다. 개개인의 생존 기간은 늘어나건만, 길어진 노년의 세월만큼 천대받다가 아무도 몰래 홀로 죽어 한참 지난 뒤에야 주검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 주검은 사흘 만에 소각, 처리되는 세태가 이 말속에 들어있다. 젊음을 늘리느라 온갖 성형기술이 난무하지만, 삶의 끝자락에선 지옥도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고독사의 기원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들이 가족을, 개인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감옥으로 여겨온 데서 비롯됐다. 그동안 우리의 지향점이었던 근대화·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선 가족이라는 족쇄를 해체하고서 개인의 해방을 이뤄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미 춘원 이광수가 “조선의 자녀는 오로지 부조(父祖)를 위해서만 살았고, 또 일했고 죽는, 부조중심의 삶을 강요받았다. 개인적 행복을 위한 교육의 자유와 혼인의 자유까지 부모에게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데서부터 그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날개’의 작가이자, ‘오감도’의 시인인 이상(李箱)의 가족관도 다를 바 없었다. 혈연에 대한 지긋지긋한 원한이 김해경이라는 본명을 성조차 바꿔 이(李)로 표현한 것이리라.
    현대 한국에서 가족에 대한 증오, 가족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가족의 파괴는 전면적이고 의도적으로 이뤄졌고, 그것은 문명의 이름으로 숭상됐다. ‘개인의 자립’이 근대문명을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은 개인의 자립에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은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는 것이 어릴 때부터 가슴깊이 품었던 인생철학이었다. 그런 까닭에 근래 들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가족중심주의를 나는 우려한다. 가정은 세상으로 진출하는 베이스캠프일 뿐이다. 1차 집단인 가족과 가정이 지나치게 중요시되면 그 사회는 결코 진보하지 못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지난 세기 한국인의 꿈은 가족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해 ‘내 인생은 내가 산다’는 개인주의 철학을 실현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머지않은 오늘날, 이 땅에는 홀로된 개인이 넘실대면서 그 개인의 발목을 잡는다고 여긴 가족은 기념일로 추억할 따름인 희소물이 되고 말았다. 다시금 오늘날 이 땅 도처에서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그들은 가족의 돌봄조차 입지 못한다. 한 언론인은 오늘날 가족붕괴 현상을 이렇게 개탄했다.

    “국가는 경쟁력 강화와 선진화에 여념이 없고, 사회는 이미 정글로 변해 아무도 남의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가족 살해다. 사회가 낙오자로 찍기만하면 찍힌 이가 알아서 나머지 쓸모없는 가족을 사회로부터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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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이라는 희망

    가족붕괴로 인한 인간 가치의 상실은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재현된 바다. 대표적으로 공자의 시대가 그러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처참한 전쟁의 세월이었다. 그 와중에 가족은 와해됐다. 농경시대에 농사를 지어야할 아버지가 장정으로 끌려가 병사가 돼야했기 때문이다. 공자의 문명재건 프로그램에서 가족재건이 절실하게 중요한 까닭은 동아시아에 이스라엘 식의 창조주, ‘야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평화는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땅 위에서 자행되는 짐승보다 못한 살육과 폭행의 지표 밑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는 맑은 지하수가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삼아 세계평화(평천하)의 꿈을 꿨다. 즉 공자는 가족이라는 공간 속에 흐르는 내리사랑(자애)과 치사랑(효도)의 순환을 발견했고 여기서 발생하는 따뜻한 에너지를 확산시켜 세계를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기획한 것이었다.
    여기 부모에서 자식으로 흘러내리는 내리사랑과 자식에서 부모로 거슬러 올라가는 치사랑의 순환과정에서 발생하는 따뜻한 기운이 화목이다. 화목의 운영원리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에서 명징한다. 나와 상대방이 서로 다름(차이)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다(화이부동이란 말 속에, 이미 화=부동이 전제돼있다). 소설가 공지영이 통찰력 있게 지적했듯, ‘가족은 사랑하는 타인들의 만남’이다.
    여기서 가족은 역설적인 공동체가 된다. 원초적으로 가족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다. 피의 본질적 점착력으로 인해 가족은 구속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파생한다. 즉 부모는 자식의 성장 과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화(同化)를 행사한다. 그러나 공자가 제시하는 화이부동 논리는 이질성을 전제하므로(예컨대, 자식은 부모와 다르다, 아내는 남편과 다르다) 혈연의 동화에 저항한다. 결과적으로 화이부동은 동화(내리사랑, 권력)와 이화(차이, 타자)가 팽팽하게 긴장하면서 공존하는 역설적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화목한 가정이란 그저 일요일 아침드라마처럼 ‘하하호호’ 웃음으로 충만한 집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구속과 서로가 다르다는 개체성이 길항하면서, 매일매일 대화와 소통을 통해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동체다. 가족이란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타인들의-만남’이다.
    액자로 늘 걸려있던 ‘가화만사성’이라는 말 속에 실은 가족이 희망이라는 공자의 꿈이 아로새겨져 있다. 가족 속에서만 빚어지는 참된 사랑의 동력인 화목이 그 문턱을 넘어 마을로, 또 사회로 나아가 국가와 천지간에 닿는 것이 ‘가화만사성’이란 말뜻이요, 그 전개과정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비전이다. 다만 이 프로그램 속에는 가족 사랑이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제 자식과 제 부모만을 아끼는 ‘가족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담겨있다.
    이른바 가족의 달 5월, 오랜 세월 우리에게 평범하고 시큰둥하게 여겨져 온 가족의 의미를 낯설게, 또 의미심장하게 따져볼 수밖에 없게 됐다. 서글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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